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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2 홈스쿨/드라마 역사공부

[신라]드라마 대왕의 꿈( 김유신과 김춘추)

by 말그미맘 2020. 9. 26.

 

김유신의 생애로 보는 역사적 배경)

 

김유신은 멸망한 가야 왕손으로 충청도 진천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 화랑이 된 김유신은 

30대 중반에 부장군(연대장 급)으로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그 명성이 온 나라에 퍼졌다.

그는 가야계라는 신분적 제약을 극복하고자 자신의여동생을 왕족인 김춘추에게 시집 보내게 된다. (11화)

 

선덕여왕의 비호 아래 김유신과 김춘추는 급성장하였고(30화)

선덕여왕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에 오르게 된다. 

 

660년 김유신과 김춘추는 당나라와 힘을 합쳐 백제 정벌을 나선다. 화산벌 전투, 백제 수도 사비성 공격.(58화)

661년 김춘추가 죽고 아들 문무왕이 왕위에 올랐다. 

668년 신라는 당나라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했다. 김유신은 이때 74세로  전장에 참가하지는 못했다. 

673년 김유신(태대각간) 사망.

 

 

youtu.be/6tC3i_wr2Do

 

선덕여왕과 분황사 여행

선덕여왕은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던 진흥왕과 진평왕을 잇는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성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즉위 초부터 관료들의 반대에 부딪힌 선덕여왕은 분황사(芬皇寺) 창건을 통해 극복하려 했고,

실제로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았다.

 

신라 중고기 경주에는 45개의 사찰이 있었는데, 그중 24개의 사찰이 선덕여왕 때 창건되었다. 이는 법흥왕 이후 불교국가로서 변모하면서 나타난 현상이기도 했지만, 선덕여왕이 다른 왕들보다 불교의 힘으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으므로 볼 수 있다.

 

분황사가 선덕여왕과 원성왕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이용되었지만,

원효하고도 깊은 관련이 있다.

 

원효는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숭상받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큰 스님이다.

전국의 많은 사찰이 원효와의 연관을 내세우지만, 분황사만큼 연을 맺은 사찰이 드물다.

원효는 이곳 분황사에서 <화엄경소> <금강명경소> 등을 저술했고,

유해로 만든 소상(찰흙으로 만든 형상)이 고려시대까지 있었다.

 

원래는 신라를 대표하는 7사찰 중 하나로 규모가 컷으나 지금은 1/10 이하로 줄어들어 3층까지 밖에 남지않은

모전석탑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 분황사와 담을 맞댄 활룡사지, 서쪽의 첨성대와 내물왕릉, 동쪽의 선덕여왕능, 진평왕능, 설총의 모 함께 돌아보기.

 

 

우리나라 국보 29호 에밀레 종.= 봉덕사종= 선덕대왕신종

종을 완성하기 위하여 아기를 쇳물에 던져넣었다는 설화로 모두 기억하는 에밀레종.

과학적 검증을 통해 칼슘과 인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실화가 아니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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